운젠이란?

운젠의 역사

고대부터 에도 시대

서기
역사 기술
88
온천 산이나 시마바라의 일이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
701
승려 교키를 창건하고 시멘구(四面宮)를 함께 모시고 산호를 온천 산이라고 일컫다
713
히젠 풍토기에 "다카키노 군"의 이름의 유래와 온천의 것으로 적혀 있다
749
교키 보살 사망
778
대승원 미츠 아키사 소실
790
홍법대사온천 산 등산, 영지에 듯이 없다고 칭찬한다(전설)
931
승원 미츠 아키사 다시 화재로 전소(온천 산 불길)
1115
세토 이시하라에 300 돌아가 딴 곳에 700보, 아울러 100보도 있었던 적이 있다(온천 산 기원)
1571
대승원 만묘지 소해이, 싸움을 일으켜, 절들도 거처도 소실 "백작의 난"는 (자슈한단키<邪宗判断記>)
1625
마츠 쿠라 분 고 슈 시게 마사(松倉文後守重政), 도쿠가와 막부의 명령에 의한 기독교 탄압을 엄중히 하다. (이 해 교도 10명을 온천 불 구멍에 던졌다고 전해진다)
1627
기독교 신자에 대한 탄압은 더욱 어려워진다. 이 때부터 1630년까지 "산에 들어가 "면 기독교 단을 온천에 보내 지옥에 떨어뜨려 개종을 촉구했다
1637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난다. 12월 3일 반군의 주장 마스다 아마쿠사 시로 토키 사다(益田天草四郎時貞)는 하라 죠에 입성, 반란군 수 23,800여
1638
2월 28일 식량 및 탄약 다함 함락. 난 평정. 노소 남녀 35,000명 전원 사망
1640
대승원 큐치(旧地)를 일으키고 일대가당이 건립됐으며 이치 죠잉(一乗院)으로 일컷다
1653
카토 젠좌 에몽(加藤善佐衛門), 운젠에 욕조을 창립, 엔레키토우(延暦湯)로 명칭(공동 목욕탕의 시작)
1657
후겐다케 구혈 부근(普賢岳鳩穴付近)에서 북쪽으로 용암을 분출(메이레키<明暦>의 폭발)
1663
3월, 후겐다케 남측 폭발(1663년 분출)
1672
온천의 고(古)유에 욕조를 파고 2대째 카토 젠좌 에몽(加藤善佐衛門)이 탕수에 오르다
1690
켐페루, 나가사키에 와서 서양 의술을 전한다. 머무는 동안 저술한 『일본 사화』에 운젠의 지명이 나온다 (유럽에 소개한다)
1693
온천 보호를 위해 산지기인을 두고 4월 1일 경내 입구 4곳에 제찰을 세우다
1731
온천의 소(小)지옥으로 목욕탕을 만들다. 이를 미나미 온천(南温泉)이라 부르고, 1653년에 판 고(古)유를 키타 온천(北温泉)이라고 부름
1738
후겐다케에 살생 금지의 돌 명폐가 세워지다
1755
온천에 고마도(護摩堂)가 건립되다
1775
온천 산 보호를 위해 시마바라 영주가 산 류역을 둔다
1792
대지진 때문에 비잔이 급락해 대 해일 발생(시마바라 힘들고 괴로움)
1792
온천 후다노하라(札の原) 수전 공사 완공
1823
지볼트 『일본』를 저술, 그 저서에 운젠의 지명이 나와있다.”UNZEN·TAKE”로 유럽에 소개
1853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소(小) 지옥에 들어가다
1855
타카시마 탄광(高島炭坑) 기사 브라운이, 외국인 등산 금지의 운젠 등반, 우에다 집(上田屋)에 투숙
1867
영국인 2명이 허가 없이 등반했지만, 소(小)지옥에서 붙들려 나가사키로 호송되다

메이지부터 쇼와 초기

서기
역사 기술
1870
미국 장교 7명, 통역, 주방 보이를 데리고 유모토 여관(현 유모토 호텔)에 체류
1878
신유 온천 개발. 운젠에서 양 사육. 일본인 탕 외에 요우진후로(洋人風呂)라고 칭하고 한 사람만 목욕하는 목용탕을 만들고 혼욕을 피한 결과 외국인 체류 손님이 늘다
1883
순수 양식의 시모다(下田)호텔이 신축된다. 미도리야(緑屋)호텔이 외국인용으로 설비를 고치다
1890
외국 잡지, 상하이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에 운젠이 소개된다. 외국에서 피서객이 증가함
1891
유센베이(湯せんぺい)을 시제
1893
신유(新湯)의 카메야 여관(亀の屋旅館)(현 신유 호텔)이 외국인 전문 호텔이다
1895
청일 전쟁 이후, 하얼빈,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인 피서객이 증가함
1899
계절(여름)전신 취급소가 설치됨. 6년 후 2등 우편국이 되어
1905
독일 벨츠 박사 등산, 현 당국에 현영 보양 온천 공원 설치를 진언
1911
4월 우리 나라 최초의 현영 운젠 공원이 개설(온천 공원 단속 규칙이 정한다)
8월 현 운젠 공원 사무소 설치(민가 빌어 쓰는 오바마 운젠 간 도로 개량, 완성. 자동차가 달림
운젠, 오바마에 전등이 켜지다
1913
현영 골프장(이케노 하라<池の原>, 9홀)개설. 현영 테니스 코트 개설(유노 사토<湯の里>)
1916
치지와(千々石) 운젠 간 자동차 도로가 완공
1918
7월, 일본 투어리스트 뷰로(JTB)여름 온천 출장소가 공원 사무소 안에 개설한다
1920
요시 이이 사무(吉井勇)·사이토 오모 키치(斎藤茂吉)가 방문
1921
8월 첫 국제 테니스 대회 개최
1922
운젠, 오바마 간에 정기 버스가 달린다. 시마바라, 운젠 간에 자동차 도로가 완공
1923
1월 1일 견립 산에 기상 관측소가 설치된다. 운젠에 가로등이 점등된다
1924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방문
1925
치치부노미야 전하(秩父宮殿下)께서 후겐다케 등산
1927
운젠 케가 "일본 신 팔경"산악 부문에서 1위이다. 외국인객 2만명을 넘다
쇼카이세키(蒋介石) 방문. 다카 마쓰노 미야 전하(高松宮殿下)께서 방문
1928
운젠다케가 당시의 사적 명승 천연 기념물 법에 의한 명승지로 지정된다
1929
6월 뱃쇼에 수영장이 설치. 토쿠토미 소봉가(徳富蘇峯) 방문
1930
8월 운젠 국제 관광 협회 설립
1931
운젠 승마 협회 결성 *만주 사변 발발
1933
1월 운젠 대궁장(大弓場) 완공
7월 백운의 연못 캠프장 개설
히가시 후시미 노미야 왕비전하(東伏見宮大妃殿下), 다카 마쓰노 미야 왕비전하(高松宮妃殿下)께서 방문
1934
3월 16일 국립 공원으로 지정한다
온천 공원의 이름을 정식으로 운젠 공원으로 변경
현영 버스가 나가사키와 운젠 사이에 개통(현영 버스 출범)
국제 관광 산업 박람회의 제2회의장인
1935
키타 와라 하쿠슈(北原白秋)가 방문
1936
니타 자동차 유료 도로 완성 *2.26사건 발생
1937
국립 공원 지정 기념 운젠 기념관이 준공
온천다케 측후소(測候所)가 설치된다
1941
*태평양 전쟁 개전
1942
미카 사노 미야 전하(三笠宮殿下)께서 방문

전쟁 후 부터 현재

서기
역사 기술
1946
미 주둔군에 의해 현의 소유지(골프장)및 호텔들이 접수당함
1949
일왕 행차되다
1950
제6회 일본 유네스코 대회 개최
골프장, 테니스장, 각 호텔 등의 미 주둔군에 의해 접수 해제
1951
국제 골프 대회 및 국제 테니스 대회 재개한다
1952
문화 보호 법에 따라 운젠 타케시는 후지 산과 함께"특별 명승지"으로 지정되다
1954
영화"키미노나마에와(君の名は)"의 촬영이 시작된다
국립 공원 지정 20주년 기념식 개최
1955
벳쇼의 수영장 폐지
1956
일본 유엔 가입 결정
국민 휴양지로 지정된다
아마쿠사 제도를 함께 운젠 아마쿠사 국립 공원이 된다
1957
오바마, 운젠 간 유료 도로 완성
니타 고개·묘켄 타케 로프 웨이 완성
집단 시설 지구 구역 및 계획 결정한다
1958
오락관 노후화 때문에 철거
1960
운젠·시마바라 간 유료 도로 완성
1961
천황·황후 양폐하가 방문
전국 종합 개발 계획 결정
1963
현 국제 관광 회관 준공
관광 기본 법 통과
현영 버스 나가사키 공항·운젠 간 직행 버스 운행 개시
1964
국립 공원 지정 30주년 기념식 및 나가사키 현 자연 공원 대회 개최
규슈 국제 관광 버스(주)가 나가사키·운젠 쿠마모토·벳부 간 장거리 버스 운행 개시
도쿄 올림픽 개최
1965
운젠을 아름답게 하는회 출범
미카 사노 미야 전하(三笠宮殿下), 동비 전하(同妃殿下) 후 방문
1966
TV "키미노나마에와(君の名は) "촬영 시작
1967
공해 대책 기본 법 제정
1969
황태자 전하께서 방문
천황, 황후 양폐하 행차 하시다
신 전국 종합 개발 계획 결정
1970
일본 만국 박람회 개막
1971
제13차 국립 공원 대회가 히타 치노 미야 전하(常陸宮殿下), 왕비 전하(妃殿下)를 모시고 개최
1973
궁도장이 노후화 때문에 철거
오바마-운젠-시마바라 간 유료 도로가 무료화
제1차 석유 파동 발생
1974
국토 이용 법 제정
국립 공원 지정 40주년 기념 행사 개최
1976
캐나다 밴프 국립 공원과 자매 맹약을 체결
TV드라마"하나보우로(花ぼうろ) "(원작 花登筐)가 방영된다
1977
히로노 미야님(浩宮様)이 방문
기념관 노후화 때문에 철거
제3차 전국 종합 개발 계획 결정
1978
제1회 축제 운젠 개최
1981
가톨릭 운젠 교회 완성, 헌당식 하다
1982
제1회 어린이 자연 공원 대회"맨발로 노는 운젠"개최
1983
운젠 플랜 50발표
1985
운젠 메모리얼 홀 완성
국립 공원 지정 50주년 기념 광장 완성
1986
운젠 엉겅퀴 골이 "일본 삼림욕 백선"에 뽑히다
천연 기념물 진달래 도굴 방지 순찰을 시작
1987
홋카이도 가미 카와 정 소운쿄와 자매 관광 협회 맹약 조인
1988
오바마 동립 운젠 초등 학교 창립 백주년
1989
오바마, 기리시마, 마키 조노, 관광 자매 도시 맹약 20주년
1990
운젠~후쿠오카 간에 고속 버스 운행
구니미 쵸 백화합 공원에서 제41회 전국 식재제가 개최. 천황·황후 양폐하 운젠 미사 숙박
운젠 보현 악약 200년 만에 화산 활동 재개
1991
폭발의 영향으로 운젠 투숙객 대폭 감소
1992
"키미노 나마에와(君の名は) "2대째 마치코, 하루키 방문하다
용암돔 관람객 증가
운젠·오바마, 시마바라는 "리본 운젠" 캠페인 개시
1993
제3섹터 방식 다목적 보양관"운젠 스파 하우스"완성
현영 버스 터미널 2층에 "운젠 자료관"개관
시마바라 반도 전역의 활성화를 도모"시마바라 환타지아"개최
1994
운젠 국립 공원 지정 60주년
운젠 비지터 센터에 후겐다케 활동을 감시하는 하이 비젼 완성
후겐다케 용암돔 3년간의 총분출량 약 23,000만 m(도쿄 돔 78잔. 5월 현재)
"국립 공원 심포지엄"개최
1995
제49회 전국 야생 조류 보호의 미팅 개최
히타치노미야전하(常陸宮殿下)와 왕비전하(妃殿下)께서 방문하다
1996
화산 활동 종료 선언 낸다
새 용암돔"헤세이신잔"로 명명된다(해발 1486m)
황태자·동비 전하께서 방문하다
1997
향토 맥주 운젠 여행의 맥주관 완공
파이팅 계획 최종 안 발표 정리
운젠 르네상스 계획이 발표
1998
후겐다케 등반 루트 일부 해금되다
녹색 다이아몬드 계획 발표한다
운젠 미화 센터 준공
1999
후겐다케 아자미니 채널 개통된다
폴란드의 세계적 그림책 작가 유제후 뷔루콘씨가 래선
운젠 관광 협회 공식 홈페이지"루루루 운젠"개설(12월 30일)
2000
온천 포럼 inUNZEN개최
독일 바덴바덴 시장(랑 여사)래선해 기조 강연을 한다
나가사키 오랑 다년 개최
후겐다케 폭발 10주년
2001
관불회 UNZEN개최
2002
운젠 산 문화제 개최
2004
운젠 산 정보관 개관
국립 공원 지정 70주년
2005
운젠 시 탄생
쓰나미(펄 벅 원작)상영
2006
운젠 시· 기리시마 시 자매 도시 맹약
운젠 골프장 민영화
2007
운젠 가이드" 사루화(さるふぁ)"탄생
운젠 시, 한국 구례군 자매 맹약
화산 도시 국제 회의 개최
2008
관광청 출범
2009
니타 고개 순환 도로 무료화
시마바라 반도 세계 지오 파크 인정
제33회 전국 육수제(황태자 전하 행계)
2010
운젠 플랜 100프로젝트 구성
운젠 로터리 클럽 창립 40주년 기념 심포지엄
2011
동 일본 대지진 발생
큐슈 신칸센 개통
고(古)유 상가 정비
2012
후겐다케 새 등산로 개통
지오 파크 국제 유네스코 회의 개최
부산 여자 대학 우호 10주년
대만 오래구 관광 발전 협회 자매 맹약
2013
운젠 온천 관광 협회 출범
운젠 골프장 개장 100주년
2014
국립 공원 지정 80주년

불교

서기
역사 기술
701
나라 시대의 명승 교키 대승원 만묘지(名僧行基大乗院満明寺)를 건립한다. 산호는 온천산. 온천이라고 써"운젠"으로 불렸다. 또 시멘노미야(四面宮)을 모셨다. (운젠 불교 전설과 유적 참조)
713
히젠 풍토기(肥前風土記)에 온천(운젠)의 기술이 나타난다.
749
교키 보살(行基菩薩) 사망
778
대승원 만묘지(大乗院満明寺) 소실하다. 기부에 의해 중건된다
790
홍법대사온천 산 등산(운젠 불교 전설과 유적 참조)
931
대승원만묘지(大乗院満明寺) 소실하다
1115
승려 중이 대승원 만묘지(大乗院満明寺)를 재흥하다. 세토 이시하라(瀬戸石原)에 300 돌아가 딴 곳에 700보, 아울러 1,000아이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1571
대승원 만묘지승병, 싸움을 일으켜, 사찰도 소실하다. 이를 백작의 난으로 불린다. (운젠 불교 전설과 유적 참조)
1637
시마바라의 난으로 대승원 만묘지 (大乗院満明寺)를 불 태웠다
1640
대승원 만묘지 구지을 일으키고 일대가당이 건립됐으며 이치 죠우잉으로 칭해졌다
1693
시마바라 성주 마쓰다이라 충방이 이치 죠우잉(一乗院), 시멘노미야(四面宮)을 개축
1750
온천의 고(古)유에 샤카도(釈迦堂)가 들어선다
1869
온천 시멘노미야(四面宮)를 국혼 신사라고 개칭. 신불 판별의 제에 의해 쿄도마리의 말사(京泊末寺), 칸게잉(観華院)에 이치 죠우잉(一乗院)을 옮긴다
1898
이치 죠우잉의 흔적의 하나인 샤카도가 소실. 고마도도 연소되다
1900
쓰쿠시(큐슈의 옛 이름) 국 영혼 신사 1,200년제
1914
운젠국 영혼 신사가 온천 신사로 개명된 현사가 된다
1916
이치 죠우잉 샤카도 재건 공사가 완공돼 개안식이 간다
1991
분화에 따라 후겐 신사(普賢神社) 소실하다
1995
후겐 신사 임시 배전 건립된다
1997
만묘지 대웅전 중건된다

운젠 불교 전설과 유적

1)운젠의 명칭과 기원
  • 운젠의 벳쇼 부근에는 조몬 시대(縄文時代) 전기(6000년 전)의 주거 흔적이 발견되었다.
  • 운젠이 기록으로 나타날 것은 와도(和銅) 6년(713년)에 적힌 히젠 풍토기(肥前風土記)이다.
  • 히젠 풍토기에는 타카구미네(高来峰)으로 운젠이 등장하고 있다.
  • 온천산(운젠 상)와 승려 교키가 무쌍한 대승원 만묘지의 산호이다.
  • 중국과의 교통으로 동 중국해에서 처음에 보이는 일본의 산이 운젠다케이었으므로, 일본산이라고도 불렸다.
  • 운젠 산은 도쿠가와 시대의 풍아한 시인 문인과 묵객이 지은 아호였다.
  • 쇼와 9년에 국립 공원으로 지정됐을 때 온천 온천과 쓰는 것은 헷갈리기 때문에 운젠 온천과 개선되었다.
2)왜 운젠은 타카구미네(高来峰)(높은 봉우리)이라고 불렸다?
  • 히젠 풍토기(肥前風土記)에는 12대 게이코 천황이 쿠마소을 공격할 때, 오오노스쿠네(大野宿弥)에 나카스(쿠마모토현)의 바닷가에서 바다 건너에 보이는 산은 육지나 섬인지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 대노숙 와타루(오오노스쿠네)은 아리아케 카이(有明海)를 건너가 현지 지배자의 영접을 받았다고 한다.
  • 지배자는 "나는 이 산의 신 다카쿠쯔쿠라(高津来座)라고 합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타카구미네(높은 봉우리)로 불렸다.
3)온천 산과 교키(전승)
  • 온천 산 불길이라는 전승에 따르면 다이호(大宝) 원년(701년)중 교키는 아마쿠사에서 온천산(운젠다케)의 연기를 보고 온천 산을 구법의 땅으로 정하고 이윽고 쿠치 노츠, 아리에를 거쳐 잇세쿄노치(一切経の地)에 도착했다.
  • 승려 교키는 불법 홍통을 위해 4월 17일 타카키 산을 복(라고) 하고, 삼칠, 21일 기원을 담아 산의 주인을 방문했다고 한다.
  • 만원의 날의 오경(오전 4시부터 5시)무렵 공중에 1장(약 30m)정도의 이무기가 나타나 교키를 보고금세 사방의 미녀였다.
  • 교키가 "그대의 본성은 뭔가 "라고 물으면"나의 진정한 본성은 고치의 여래이다"라고 대답해 대광명"을 냈다고 했다.
  • 거기서 교키는 몬무 천황에 세우고 당탑 가람의 창건을 부탁해 칙허를 얻어 위 멩다까지 기부됐다는.
  • 칙허를 받고 승려 교키는 대승원 만묘지를 창건하고 시멘노미야(온천 신사)을 함께 모시고 산호를 온천 산으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4) 교키 입적
  • 승려 교키는 보평 원년(749년), 운젠 땅에서 입적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교키의 무덤은 사찰 노바바(ノ馬場)에 고요히 자리잡고 있으며 독실한 사람들이 꽃과 향을 바쳐 덕을 기리고 있다.
5)운젠과 대사(전설)
  • 운젠에도 홍법 대사가 들렀다는 전설이 남아 있었고, 운젠을 보고대사는 "영지 여기에 없다"라고 칭송했다고 전해진다.
6)신곤슈(真言宗)의 성쇠
  • 온천 만묘지는 비에이잔(比叡山)·고야산(高野山)과 함께 천하의 3산으로 불리고 있었다.
  • 호키(宝亀) 9년(778년), 절의 내란에 의한 만묘지는 소실하고 그래서 히젠의 나라(현재의 사가 현·나가사키 현)논밭 1핵타르(田地一町歩)에 대해 100몽(옛날 엔)의 기부를 모으고 재건되었다.
  • 그 뒤 쇼헤이(承平) 원년(931년)에 다시 소실해 이후 7여년 임시도 그대로다 일시 중단했다.
  • 에이로쿠(永禄) 3년(1115년)에 재건되면서 점차 번영하고 한때는 세토 이시하라(현재의 사쯔 노하라)산뱌쿠보우 벳쇼 7보 합계 1천 보의 승방을 자랑하며 세상의 존경을 모았다.
  • 에이로쿠(永禄) 5년(1562년)에는 영주 아리마요시나오(有馬義直)가 루이 알메다을 불러 기독교가 한창 포교되게 된 만묘지는 점점 쇠퇴해 간다.
  • 기독교가 활발히 되는 가운데, 겐키 2년(1571년)백작의 난이라는 승방 동지의 싸움이 벌어져 만묘지는 또 다시 소실하다.
  • 그 후 재건되지만, 시마바라의 난(1673년)에 훼철하면서 타격을 받는다.
  • 간에이(寛永) 17년(1640년)새로 시마바라 영주가 된 고력 충방에 의한 부흥이 실시되었지만, 엔포(延宝) 원년(1673년)화재로 소실과 영주 마쯔다이라 씨(松平氏)의 재건이 행해졌다.
  • 현재는 교토 닌나지의 말사"운젠 산 만묘지"이다.
7) 백작의 난
  • 겐키(元亀) 2년(1571년)때 고(古)유의 승방에 "학문 한 몸"이라는 어린이가 있고 한마리의 백작을 매우 아꼈다
  • 그런데 벳쇼의 승방에 있던 "호쥬마루(宝寿丸)"라는 어린이와 "시로스즈매(白雀を貸せ貸さぬ)"랑 싸움이 나, 마침내"호쥬마루"가 잘못해 시로스즈매를 죽이고 말았다.
  • 싸움은 승방 간 대립으로 발전해 마침내는 만묘지가 방화되는 사건으로 발전했다.
  • 아리마의 하라 성에 있던 아리마 요시나오는 3백의 병력을 파견해 진압하는 데 이른다.
  • 이때 분쟁의 원인이 심부름 하는 어린이에 있다며, 아리마 요시나오는 젠보우의 심부름 하는 어린이를 폭포에 빠뜨려 처분했다.
  • 벳쇼에는 지금도 심부름 하는 어린이가 떨어진 폭포가, 굉장하고 영원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8)불교 유적

다이코쿠텐죠(大黒天像)

  • 운젠 중심가에서 걸어서 약 1분의 잉꼬의 연못, 이 못 가의 자연석에 다이코쿠텐죠(大黒天像)가 새겨져 있다.
  • 작자는 불명.
  • 진언 밀교의 성지인 운젠에서 수행 중인 스님이 신앙의 증거로서 새긴 것으로 알려졌다.

잇사이쿄(一切経)폭포

  • 소(小) 지옥 근처, 타카이와 산(高岩山)의 서쪽에 있다.
  • 옛날 승려 교키가 여기에 틀어박혀 잇사이쿄(一切教)을 필사해 폭포에 흘린어도 이 땅에 묻었다고도 전한다.

지온도(知恩洞)

  • 만묘지가 일본 3대 사찰로서 번창했을 때, 세토 이시하라(현재의 사쯔노하라)의 고승들이 수행한 당우 흔적과 하고 있다.
  • 당우에의 길은 가는 거대 암석의 틈을 빠져 올라가게 된다.

카타아시토리(片足鳥居)

  • 과거 온천 신사가 사멘샤(四面社)로 불리던 시절의 제1 새.
  • 분세이(文政)10년(1827년)건립.
  • 여자는 이 새로부터 앞에 들어가지 않았다.

나노카 마와리노 이시(七日廻りの石)

  • 여인 금제지였던 운젠에서 심부름 하는 어린이로 일하는 아이에게 몰래 만난 어머니가 잠시 눈을 놓는 틈에 아이의 모습을 잃고 이 바위를 7일도 돌면서 찾았다고 전해지는 돌.

기독교

서기
역사 기술
1549
자비에루, 짐 트레이스 일행 가고시마에 상륙
1553
알메이다 수도사, 리라도에 내도 포교
1562
아리마 요시나오, 쿠치 노츠를 무역항으로 개항
1563
알메이다 수도사, 쿠치 노츠에 포교, 시마바라 반도 선교 첫걸음, 성당 건설
1565
짐 트레이스 신부, 쿠치 노츠를 포교의 본거지로 한다. 일본 교회 본부
1567
포르투갈 선, 구치 노츠 입항
1568
쿠치 노츠의 기독교 신자 1200명
1576
아리마 마사나오(有馬正直) 처자, 중신 30명과 함께 쿠치 노츠에서 세례
시마바라 반도의 기독교 신자 2만명 아리마 요시나오 사망, 차남 하루노부, 아리마 13대 영주이다
1579
뱌리냐노의 신부, 구치 노츠 상륙 포교 활동 방침을 세운다(선교 회의 개최)
1580
하루노부 부부 세례
아리마에 세미나 리오 설립(4소년 사절, 키무라 세바스찬, 니시 낭만 등 입학)기독교 문화의 중심지
1582
뱌리냐노의 신부, 견구 소년 사절단을 따라 나가사키항 출항
1583
알메이다 신부, 아마쿠사에서 사망
1584
아리마 하루노부, 우라 카미를 예수회에 맞서 나가다
1587
히데요시(秀吉)의 금교령
오오무라 스미타다 사망 수도 아래 세미나리요 아리마에 합병 이전 이키쯔키의 코레지요, 나가사키 → 치지 와 → 아리에에 이전
1588
히데요시, 모기, 나가사키 우라 카미의 땅을 예수회에서 몰수 아리마에 세미나리요을 8량미에 이전 노비샤도, 나가사키 → 아리에 → 아마쿠사에 이전
1589
야라오 세미나리요, 가즈사에 이전 인쇄기도 이전
1590
켕오우(遣欧) 소년 사절, 나가사키에 귀착 금속 활자 인쇄기를 가져가 아리에의 코레지요, 카즈사에 이전
1591
카즈사(加津佐)의 코레지요, 아마쿠사에 이전 인쇄기도 이전 카즈사의 세미나리요, 8량미에 이전
1595
야라오(八良尾) 세미나리요, 아리에에 이전
1597
아리에 세미나리요, 나가사키에 이전(26성인, 니시 자카로 순교)
1601
나가사키의 세미나리요 아리마에 이전
1604
하라 성 완성
1610
하루노부(晴信), 나드 레, 제우스고를 나가사키 항구 밖에서 격침
1613
디오고 하야시 외 7명, 아리마에서 순교
1614
이에야스(家康)의 금교령
1618
시게 마사(重政) 시마바라 위의 축성에 착수
1620
시마바라 7케촌 124명 순교의 결의 로마에 표명

교회

가톨릭 운젠 교회 사제 친정 카오루 신부님 가톨릭 운젠 교회 사제 친정 카오루 신부님

1612년~58년 사이에 시마바라 반도에서는 수만명에 이르는 기독교 집안들이 순교했습니다. 신과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바치는 다한 사람을 순교자라고 부릅니다. 혼미하는 사회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사람으로서 선함과 인심 좋음을 잃지 않고 똑바로 산 사람들입니다. 그 삶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일은 없습니다.
시대의 큰 고비를 맞아 세계는 삐걱거리는 어른 아이도 신음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세기에서 순교자들이 재림했습니다. 그 대부분은 이름도 몰라 마치 신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무명 전사"인 것 같아요 이제 우리는 그들의 결백을 소중히 해야 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세기 2000년의 도래』) 운젠·시마바라를 찾은 여러분이 확실하게 만나 진짜 행복의 길을 걷기 시작되기를 염원합니다.

운젠 순교자들과 스테인드 글라스

성모의 조
【성모의 조】

종교 개혁으로 흔들리는 유럽에서 신도의 리더 양성으로 시작된 "성모 신도회"는 일본에서는 "산타 마리아(성모)의 조"로 불리며 신도 교육을 통해 소 공동체 만들기의 형태를 취했다. 『도치리나키리시탄(기독교 집안의 가르침)』은 일본의 교회의 최초의 교리서로, 이것이 사제 부재의 교회에서 신앙 전달의 핵이었다. 또 『콘치리 씨(완전한 통회 위한 기도)』도 암송되고 순교와 후미에에 있어서 항상 제기되고 있었다. 이러한 신앙 교육과 기도 모임은 초기 교회 아니라 잠복 시대도 몰래 계속되면서 신앙은 확고해 내려오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두 사람 또는 세 사람이 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저도 그 중에 있는 것이다"(마태 18,20)신자들은 모두 배우는 빌기 위해 모여 그 일을 비추어 3개의 촛불은 삼위 일체 신의 작용 속에서 열린 것을 나타낸다. 어둠의 시대에 신은 억압 받는 사람들 속에 빛을 놓였다. 신과 만난 그들의 얼굴은 빛나고 있다.

자비의 조
【자비의 조】

성 프랜시스 자비엘이 알려진 예수의 복음은 의사인 선교사로 나선 알메이다를 통해 위안을 동반한 "신의 자애"으로서 일본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알메이다는 도처에서 복음의 권유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그룹을 양성 조직한 뒤"미제리콜디아(자비의 조)"의 기초를 마련했다. 의료·복지 활동, 빈곤자 생활 지원 등 그 활동 내용은 마태오 25장의 " 바른 사람들" 흉내내기였다. 『도치리나키리시탄』 중에는 이 자비의 반 『14의 추천 』이 암송 사항으로 기록하고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에는 이 중"것이나 몸에 대한 7가지 추천"(굶 주리는 사람 목 마른 사람, 입을 것이 없는 사람, 아픈 사람,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 사로잡혀 있는 사람, 죽은 사람)을 도안화했다."당신 아버지가 연민 깊듯이 당신들도 연민 깊은 사람이 되라"(루카 6,36) 이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은 정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행위에 의해 논리 없이 직접 일본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해지던 것이다.

성체의 조
【성체의 조】

누가 어떤 방법으로 시작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1610년경의 연례 보고서에 "성체의 조"로 불리는 신자들의 활동이 등장한다. 특히 박해에 들어가면 성체 예배와 영성체를 준비시키는 것에서 동료 신자들의 격려, 지탱했다. 시마바라 반도에서는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로 "성체의 예수는 찬미되게"을 노래하다로 보고돼 있다. 게다가 시마바라의 난에서는 "부모 성체의 반의 깃발"(시마바라의 난의 진중기)나 메다이를 입에 넣고 참수된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의 발굴 등 성체에 관련된 신자들의 신앙의 표시를 인정할 수 있다. 성체와 순교의 깊은 애착을 준 것은 스스로도 로마에서 순교한 안치오키아의 주교 이구 나치오이지만 일본의 신자들도 같은 영성을 살아 있었다고 추측된다. 왜 그리스도교들이 저렇게 살고 죽었을까, 그 이유는 성체에 도착한다."미사(성체)는 기독교 집안의 원천이요, 정점입니다"(『교회헌장』)스테인드 글래스는 "성체의 반의 깃발"을 본떠서, 오스티아와 리스 앞에서 예배를 바치는 천사와 함께 신자들도 그 예배에 참여하는 꼴을 그렸다. 그것은 신이 쓰기에 얻어낸 하늘의 빵에서 기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며, 동시에 예수의 생명에 길러지고 예수를 닮은 사람이 되도록 초대된 인간들의 결의도 보이고 있다.

칼을 쟁기에 창을 낫에
【칼을 쟁기에 창을 낫에】

상기에 제시한 교회의 3개의 기능은 예수가 메시아(그리스도: 기름을 받은 자)인 데서 오는 3가지 사명(예언자, 왕직, 사제직)에 기인한다. 어느 시대에서나 이들 기능은 교회의 기본이며, 가르치고 뒷바라지하고 빌3가지 모습을 골고루 갔을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키까지 성장해 간다. 순교 시절 일본의 교회는 그 성장한 모습을 표시로 남기고 있다. 시마바라의 난의 격전지라 성지에서 오늘날 발굴된 많은 묵주의 구슬이나 메다이와 십자가는 농성 중이던 천주교들에 의해 박힌 대포와 총 알에서 조작된 것으로 생각한다.
싸움의 도구를 기도 도구로, 살육의 도구를 평화의 도구로 만들었습니다."그들의 칼은 반복하고 쟁기로 창을 반복하고 낫으로 "(이사야 2,4)신의 예언은 진실입니다. 그러나 대포의 구슬을 묵주의 구슬을 맞고 전에 그리스도교들을 아담부터 신의 자식들이 만들어 바꿔주시는 분이 있었다. 묵주는 만들어 주시는 분들의 "중개의 기도"입니다."이 사람이 무슨 이르면 그대로 하세요"(요한 2,5)건조한 물을 구수한 포도주로 바꾼 분에게 전하다 것은 성모의 역할입니다. 그리스도는 새로 만들다 할 수 있다는 "유월절"에 마리아를 개재시킨 것입니다. 납의 묵주의 구슬은 순교 시대의 교회가 남긴 "유월절"의 표시입니다.

일본의 교회
【일본의 교회】

일본의 교회만큼 신도가 이끌어 형성된 교회는 세계에 유례없는. 특히 250년간 사제 부재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끊이지 않았던 것은 인간의 기능을 넘어선 일에는 틀림없지만 신도만으로 교회가 존속할 수 증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특별히 뽑힌 신도들의 존재는 무시할 수 없다."서울로 가세요. 물동이를 나르고 있는 남자 만난 그 사람 따라가요......"(마르코 14,13)"가령, 레위인의 사람, 사도들에서 바르나 바"위로의 아이"라고 불렸던 키프로스 섬 태생의 요셉도 가지고 있던 밭을 팔고 그 대금을 가져와 신도들의 발밑에 둔."(신도 4,36-37)신도들의 시대에서 신은 그 미 수를 위해 신도들을 거느리 지키기 위해 미리"위로의 아이"를 뽑고 기다리게 해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을 숨겨 신도들을 묶어 몸으로 교회를 옹호하는 그들은 신에게는 "사랑하는 아이"에 틀림 없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바르나바들"에 따라 일본의 교회는 유지되어 왔다. 그들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빵(성체)를 받다 한 알의 보리이며, 그 피를 받다 한 알의 포도 같기도 하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일본의 교회 바르나바들을 대표해 지금 시복 신청 중인 운젠 6명의 순교자의 얼굴과 빈 손바닥을 그렸다.

자리 성모와 일본 교회
【자리 성모와 일본 교회】

" 보세요. 당신의 어머니입니다."(요한 19,27)십자가 상의 예수는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 시달릴 것의 어머니로서 우리에게 내민. 그 이후, 성모 마리아는 시달리는 사람 옆에 잠자코 자리하고(Stabat Mater: 자리 성모 슬픔의 성모) 있다. 침묵의 250년간의 일본의 교회에는 한 사제도 없었지만 그 십자가 옆에 가는 성모는 이 고통의 교회에 가만히 쉬고 계셨다. 그것은 교회뿐 아니라 매년 매년 후미에를 갖고 그때마다 "이 리치 씨"을 주창하고 죄를 표지 모델, 신앙을 새롭게 하려는 가난한 신도들 옆에 가만히 쉬고 계셨다. 1854년"원죄의 오은 숙박"의 신앙 항목이 선언되어 그것을 확인하듯 1858년 루르드에 성모가 출현했고, 이 마리아에 대한 신앙으로 양성된 파리 미션회 선교사들에 의해 신은 일본의 침묵의 교회의 문을 열게 했다. 그 때 심벌(신조: 원래"부절""구호"는 뜻)은 『산타 마리아는 어디입니까?』였다. 일본의 교회의 부활에 입회한 쁘띠 장 신부와 스기모토 유리를 대표로 하는 잠복 그리스도교는 서로 교회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통해 그 신앙을 확인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비에르 때부터 줄곧 일본 교회와 함께 걸어온 거예요. 게다가 1945년 8월 9일 미국에 의해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 폭탄은 우라 카미 성당 위에서 작렬했습니다. 그때 십자가 옆에 서는 마리아 상의 기도하는 손은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때까지도 고통 받는 사람들 옆에 잠자코 서 있었습니다."7대가 지나면 로마에서 파ー파님 씀씀이가 온다"과거 잠복 그리스도교 사이로 알려진 약속은 쁘띠 장 신부를 통해 실현했다. 그리고 1981년 2월 26일 그 파ー파님(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땅을 찾아 신도 발견의 성모 앞에서 일본의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교회와 스테인드 글라스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부터 미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음 편하게 미사 참여 바랍니다.
매일 오전 9시~오후 5시까지는 스테인드 글라스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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